말씀의 초대

다윗은 전쟁터에서 우리야를 가장 위험한 곳으로 보내어 죽게 만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도 자라고 열매를 맺어 수확할 수 있게 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너는 나를 무시하고,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다 (2사무 12,10 참조).> 11,1-4ㄱㄷ.5-10ㄱ.13-17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1 해가 바뀌어 임금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자,
다윗은 요압과 자기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을 내보냈다.
그들은 암몬 자손들을 무찌르고 라빠를 포위하였다.
그때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2 저녁때에 다윗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왕궁의 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옥상에서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 여인은 매우 아름다웠다.
3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는데,
어떤 이가 “그 여자는 엘리암의 딸 밧 세바로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가 아닙니까?” 하였다.
4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을 데려왔다. 그 뒤 여인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5 그런데 그 여인이 임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어, “제가 임신하였습니다.” 하고 알렸다.
6 다윗은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어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를 나에게 보내시오.” 하였다.
그래서 요압은 우리야를 다윗에게 보냈다. 7 우리야가 다윗에게 오자,
그는 요압의 안부를 묻고 이어 군사들의 안부와 전선의 상황도 물었다.
8 그러고 나서 다윗은 우리야에게,
“집으로 내려가 그대의 발을 씻어라.” 하고 분부하였다.
우리야가 왕궁에서 나오는데 임금의 선물이 그를 뒤따랐다.
9 그러나 우리야는 제 주군의 모든 부하들과 어울려 왕궁 문간에서 자고,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10 사람들이 다윗에게 “우리야가 자기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하고 보고하자,
13 다윗이 그를 다시 불렀다.
우리야는 다윗 앞에서 먹고 마셨는데, 다윗이 그를 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자 우리야는 밖으로 나가
제 주군의 부하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고, 자기 집으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14 다음 날 아침, 다윗은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야의 손에 들려 보냈다.
15 다윗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심한 곳 정면에 배치했다가,
그만 남겨 두고 후퇴하여 그가 칼에 맞아 죽게 하여라.”
16 그리하여 요압은 성읍을 포위하고 있다가,
자기가 보기에 강력한 적군이 있는 곳으로 우리야를 보냈다.
17 그러자 그 성읍 사람들이 나와 요압과 싸웠다.
군사들 가운데 다윗의 부하 몇 명이 쓰러지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도 죽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씨를 뿌리고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4,26-34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마르코 복음의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 그분 자체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참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마르코 복음은 재촉합니다. 마르코 복음 막바지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이방인인 백인대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메시아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우며 또한 멋스러워야 하고 힘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당시 유다 사회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지요. 세상의 논리로 보자면 실패 그 자체인 십자가, 그 십자가를 지신 분을 메시아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당위에 대한 저항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대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오늘을 애쓰며 살아갑니다. 신앙이 목적을 가지는 순간, 오늘, 지금의 시간에 대하여 결핍 의식을 지닐 때가 가끔 있습니다. ‘아직 멀었어. 좀 더 노력해야 돼.’라고 되뇌이며 내일의 희망찬 하느님 나라를 꿈꿉니다.

그러나 바로 이 자리,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는 ‘저절로’ 자라납니다.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실재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맞갖게 사는 것은 오늘 ‘이렇게 해야 돼!’라는 당위를 다시 한번 되짚어 물어보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오늘의 ‘당위’가 어떤 이를 겁박하고 억압하는 일은 없는지, 오늘 나에게 당연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짐으로 여겨지는 일은 없는지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우리 곁에, 이 자리에서 커져 갑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Posted by 에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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