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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10/9)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죽어 버린 아주까리 때문에 화를 내는 요나 예언자에게,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복음).

제1독서

<네가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4,1-11
1 요나는 매우 언짢아서 화가 났다. 2 그래서 그는 주님께 기도하였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3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4 주님께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말씀하셨다.
5 요나는 그 성읍에서 나와 성읍 동쪽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하였다.
6 주 하느님께서는 아주까리 하나를 마련하시어 요나 위로 자라오르게 하셨다.
그러자 아주까리가 요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워
그를 고통스러운 더위에서 구해 주었다.
요나는 그 아주까리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7 그런데 이튿날 동이 틀 무렵,

하느님께서 벌레 하나를 마련하시어 아주까리를 쏠게 하시니,
아주까리가 시들어 버렸다.
8 해가 떠오르자 하느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보내셨다.
거기에다 해가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요나는 기절할 지경이 되어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9 그러자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가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11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유다인들도 의무적으로 바쳐야 하는 기도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예수님의 기도가 그들의 기도와는 달리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나 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다른 복음사가들에 비하여 유독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많이 전해 주고, 특별히 큰 사건을 앞에 두고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셨는지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그러나 주님의 기도 첫 줄에서부터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가 당시 사람들의 기도와 무엇이 달랐는지 금방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 기도는 바로 자녀로서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첫마디의 ‘아버지’라는 호칭은 단순히 하느님을 부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분이 바로 나의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라는 신앙 고백입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람어로 ‘아빠’라고 부르셨고, 그 말은 육으로 맺어진 친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그것을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로 우리 모두가 당신을 통하여, 당신 안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들임을 깨우쳐 주십니다.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가 완벽한 기도이면서 동시에 우리 기도의 모범임을 발견합니다. 주님의 기도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청하는 것을 감히 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Posted by 에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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